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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그녀는 결국 11시가 되기 전에 돌아갔다.. 난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짧기는 했지만 나의 밤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비록 그가 나와 닿지 못하는 장소에 있더라도 나와 같은 시간에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면 우리에겐 어떤 외로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외로움이란 감정은 근본적으로 그렇게 반향적인 현상인 것 같다.. 그 감정은 우리가 아는 사람이, 대개의 경우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없이도 다른 이들과 즐기고 있을 때에만 우리에게 되비쳐지는 감정이다.. 삶에 있어 아예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여인을, 그가 알지도 못하는 어떤 여인을 생각할 때, 또는 자신이 아닌 다른 동료들과 함께 있는 다른 누군가를 생각할 때뿐이다.. -12월 24일, <모스크바 일기> 중에서 러 시아의 상황에 대한 메모.. 라이히와의 대화 도중 난 지금 러시아의 상황이 얼마나 모순에 빠져 있는지 이야기했다.. 외부적으로 러시아 정부는 제국주의 국가들과 무역 협정을 맺기 위해 평화를 정착시키려 한다.. 내부적으로는 무엇보다 전투적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계급적 평화를 관철시키며 시민들의 삶을 가능한 한 탈정치화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파이어니어 연맹과 콤소몰에서 젊은이들은 ‘혁명적으로’ 키워지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젊은이들에게 혁명적인 것이 경험이 아닌 구호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혁명 과정의 역동성을 국가적 삶 속에서는 꺼놓으려는 시도이다..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사람들은 복고(復古)에 돌입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마치 건전지에 전력을 저장하듯 젊은이들에게 혁명적 에너지를 저장시키려 한다.. 그게 잘 되지 않는다.. -12월 30일, <모스크바 일기> 중에서 < 모스크바 일기>.. 아주 약간의 실망.... 책 자체로 흠결이 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기대치가 높았기에, 점수가 야박해졌다.. <모스크바 일기>는 말 그대로, 일기다.. 여행기로 읽어선 안 된다는 말.. 이 명민한 지식인은, 시종 투덜대고(정인과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그녀와 싸워서, 그가 익히지 못한 러시아어에 짜증이 나서 등등), 시시콜콜 고해바친다.. 벤야민의 팬들과 그를 연구하는 이들에겐 있는 그대로의 벤야민의 모습을 대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한 자료이겠으나, 생전의 그였다면 절대 이대로는 출간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적인 삶을 산 이들의, 비애쯤 될까, 이것은.... 그것은, 책 말미에 부록으로 실린 ‘모스크바’라는 짧은 제목의 글을 보면 확연하다.. 이 짧은 글은, 벤야민 스스로 의식하고 쓴 여행기이고, 그래서, 일기의 그 날것의 느낌들이 세심하게 재배치되고 재구성되어 있다.. 메모와 기록은, 그래서, 얼마나 다른 것인지.... *"짧기는 했지만 나의 밤이 충족되었"다고 만족하는 벤야민을 보면서, 사실 좀 귀엽다 고 느꼈다.. 그래, 뭐 이런 맨얼굴을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형이상학적 사유가 중심을 이루던 벤야민의 초기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적 관심으로 이동하던 1920년대 후반에 쓰여진 이 책은 스탈린 집권 직전 혁명기의 모스크바에 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유럽 대도시들에 전(반)근대의 흔적들이 어떻게 기계화, 산업화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모더니즘의 신화를 낳는지 규명하려던 파사젠베르크 의 맹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의미를 갖는 책이다. 4년 만에 출간되는 벤야민의 저작으로 그의 사상의 궤적을 종합적으로 들여다 보고 벤야민의 삶에 한걸음 더 다가서는데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옮긴이 서문
독일어판 서문/ 게르숌 숄렘

모스크바 일기

부록/ 모스크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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