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의 책들은 대부분 지루한데 그 정도를다음과 같이 구분하겠다.미치도록 지겨움: 환상의 책뭔가 있는 것 같아 계속 읽기는 하는데 어쨌든 지겨움: 뉴욕 삼부작, 거대한 괴물, 보이지 않는재밌지만 적당한 선에서 끝내줬으면 더 좋았을 지겨움: 공중곡예사완벽하지만 뒤에 실린 부록 때문에 지겨움: 빵 굽는 타자기자, 이 책은 뭔가 있는 것 같아 계속 읽기는 하는데 어쨌든 지겨운 범주에 속한다. 이 범주에속한3권의공통점은 모두 스릴러, 서스펜스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갑작스런 실종, 미지의 남자, 살인.장르 문학의 속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포스트모던 문학의 특징인데이는 언젠가 보르헤스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며 쓴 것 같으므로 오늘은 생략하겠다.보르헤스의 포스트모던이 신화적, 환상적 이야기에 뿌리를 대고 있다면 폴 오스터는 확실히 도회지 출신다운 세련된 면이 있다. 그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쓰지만 배경은 언제나 눈에 잡힐듯한 현실이다. 보르헤스를 아예 읽지 못하는 사람도폴 오스터를 읽는 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지겨움을 잘 참아내야하긴 하지만.<보이지 않는>은 그 동안 내가 읽어온 폴 오스터의 책 중 가장 노골적으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포스트모던!)를 하는 이야기다. 작품은 과연 작가의 손에서 완결되는가? 작가가 결론을 내린 이야기는 거기서 생명을 잃고 박제된 채로 영원히 살아가는가? 독서란 행위의 본질은 무엇인가? 독자는 독서를 통해 이야기에 개입할 수 있는가? 독자는 작가가 박제한진리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가?포스트모던 문학에서 이야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주제가 된다. 그들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야기가 발화자의 입에서 완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한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청자이자 동시에 화자이므로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독자는 이야기의 신전에 앉아 작가의 계시를 받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가 받은 계시를 스스로 이야기하며 그 이야기가 그 계시와 얼마나 일치하는지에는 관심이 없다.폴 오스터는 자신의 자아를 두 개로 나눠 <보이지 않는>의화자로 등장시킨다. 이 책의 1부는 대학 시절의 폴 오스터(작중 인물 워커)가 주인공이며 그가 보른이라는 정체불명의 교수를 만나 겪는 신비한 일을 다룬다. 2부는 성공한 소설가 폴 오스터(작중 인물 짐)의 시점으로 쓰였으며 한 때 대학 친구였던 워커가자신이 쓴 소설 원고(이 책의 1부)를 소포로 보내면서 시작한다. 둘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짐은 1부를 탈고한 이후더 이상 진전이 없던 워커에게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 그가 다시 원고 앞에 앉게 한다.3부는 워커가 죽기 직전 남긴 원고인데,온전한 문장이 아니라 일종의 개요였다. 아마도 3부가 온전한 문장으로 <보이지 않는>에 실린 이유는 짐이 워커의 개요를 토대로 3부를완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4부는 짐이 워커의 누나를 만나 그의 원고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누나는 짐에게 워커의 원고를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해주길 원한다. 그리고 짐은 수락한다.따라서우리가 읽은 <보이지 않는>은 워커의 원고를 토대로 짐이 쓴 소설일 것이다.그렇다면 잠깐만.<보이지 않는>의 작가라고 소개되는 폴 오스터,책의 표지에 버젓이 자신의 이름을 올린 이 뉴저지 출신의 신비주의자는 무엇을 한 걸까?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던 문학의 백미를 느낄 수 있다.짐과 워커는 폴 오스터가창조된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마침내 자기들을 창조한 작가를 제거해버린다. 이 책의 진정한 작가는 누구인가? 짐? 워커? 폴 오스터? 아니면 그들 모두? 내 말이 말장난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폴 오스터가 짐과 워커로부터 원고를 받아<보이지 않는>에 그대로 옮겨놓은 게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작가의 권위는 사라지고 오로지 무한히 확장하는 텍스트만이 남는다. 진실을확증해줄 절대 권력의(작가의)부재로 인해 세상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나의 진리를 파기함으로써 수백, 수천 만개의 새로운 진리를 획득한 것이다. 누가 진리는 오직 하나라고 말했는가?끊임없이 원본과의(진리) 대조를 강요하며 진실인지 거짓인지추궁하는 독재자는 포스트모던의 유희에 단단히 묶여단두대의 칼날 앞에 목을 드러낸다.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포스트모던이 단순한 말장난처럼 느껴지는가? 하지만 이런 생각이 정치, 사회적으로 해석될 때 탄생하는의미는 당신의 생각을 고쳐줄지모른다. 작가라는 절대 권력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화자가 되는 것. 권력에 짓눌리고 패배감에 젖어 수동적 좀비가 되는것과 권위를 부정하고 이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재창조할 수 있다고 믿으며 광장으로 나가는 시민. 포스트모던의바보같은 말장난이 정말 이것과 다르다고 생각한다면,시간을 갖고 꼭 한 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폴 오스터의 보이지 않는 의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당신은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어질 것이다. (……) 만약 당신이 소설과 사랑에 빠지는 크나큰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독서를 한다면, 보이지 않는 을 읽어라. 이 소설은 폴 오스터가 쓴 모든 작품을 통틀어 가장 뛰어나다. _ 뉴욕 타임스


보이지 않는 은 오스터가 그간의 작품들에서 천착해 온 주제 의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그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말 그대로 〈스토리텔러〉로서의 오스터의 진면목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1967년 봄, 스무 살 청년 워커가 한 프랑스인 커플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하나의 우발적 사건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사람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것을 즐기는 기이한 욕망을 지닌 루돌프 보른이라는 인물을 만난 약관의 순수한 청년이 겪는 사건과 심리의 변화는 우리를 순식간에 사로잡아 1967년의 뉴욕, 그리고 파리로 데려간다.


세 사람의 목소리와 세 가지 화자가 조합해 내는 하나의 이야기

소설 속의 소설,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구조는 소설의 형식을 끊임없이 탐구해 온 오스터가 즐겨 써온 기법으로, 이번 소설 역시 그러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면서도 보이지 않는 은 세 인물이 서술을 하는 큰 틀 속에서, 주인공 애덤 워커의 회고록이 세 가지 시점으로 진행된다는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소설은 1967년과 2007년, 40년의 세월을 넘나들며 진행된다. 베트남전의 악령이 미국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던 1967년, 당시 청년들은 전쟁의 당위성 문제는 둘째 치고 당장 대학을 졸업하면 군대로 끌려가야 한다는 현실적 문제에 당면해 있었다. 2007년 예순 살이 된 워커는 당시 시인이 되고자 하는 꿈과 징병이라는 상충되는 문제 속에 고뇌하던 자신에게 벌어졌던 기묘한 사건들, 자신의 삶의 행로를 바꾼 1967년의 일을 기록한 다. 각각 〈봄〉, 〈여름〉, 〈가을〉이란 제목을 붙인 이 회고록을 쓰는 과정에서 그는 글쓰기의 난관에 부닥치고, 그 어려움을 40년 전 컬럼비아 시절 친구였던 작가 짐에게 상담한다. 〈봄〉의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쓴 워커에게, 짐은 1인칭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 시점으로 서술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한다. 그리하여 〈여름〉은 2인칭, 〈가을〉은 3인칭의 세 가지 시점으로 쓰이게 되고, 독자는 각각의 장(章)에서 한 주인공을 놓고 다른 거리감을 느끼며 워커의 〈회고록〉을 읽게 된다.


정의를 갈구하는 순수한 젊은 날의 초상

〈봄〉은 스무 살의 문학청년 워커가 보른과 마고라는 이름의 프랑스인 커플을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워커가 다니는 컬럼비아 대학의 정경학부에 방문 교수로 와 있는 보른은 〈전쟁은 인간의 영혼을 가장 순수하고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라 말하는 사람으로, 무슨 영문에서인지 워커에게 함께 문학잡지를 창간할 것을 제안한다. 워커는 보른의 내면에 자리 잡은 어둠과 냉소를 경계하면서도 그 유혹적 제안을 물리치지 못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싶은 순간,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해 워커의 삶을 뿌리째 뒤흔든다. 보른과 함께 산책하던 워커는 한 소년 강도를 만나는데, 보른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 소년을 칼로 찌른다. 그 소년을 살리려 하는 워커와 달리 보른은 냉혹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워커가 엉거주춤 망설이는 사이 보른은 프랑스로 귀국해 버리고, 그 과정에서 워커는 자기 자신에게 심하게 실망한다.


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기억이 지닌 힘

그해 여름 우울함 속에 방학을 맞은 워커는 누나 그윈과 함께 아파트를 나누어 쓰게 된다. 그리고 찌는 듯한 더위가 기승을 벌이는 뉴욕의 아파트에서 두 사람은 질풍노도와 같은 여름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은밀한, 가장 금기시되는 터부를 범한 두 사람의 일은 그윈에 의해 부정된다. 그럼에도 짐은 워커의 원고를 심약한 병자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꿈꾼 환상으로 치부하는 그윈의 주장을 쉽게 믿지 못한다. 〈봄〉과 〈가을〉이 모두 진실이라면 워커가 굳이 〈여름〉만 꾸며내서 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에 반해 평온한 가정을 꾸려 가는 그윈이 그 이야기를 거짓으로 몰아붙일 이유는 많다. 여기에서 독자는 진실과 환상, 실제와 허구의 경계에서 길을 읽게 된다. 이후 나오는 보른의 이야기, 또 마지막에 나오는 원고에 대한 짐의 설명은 이 소설 전체의 진실성에 의심을 갖게 한다.


아름다운 문체와 섬세한 심리 묘사

「선데이 타임스」는 이번 작품에 관한 서평 기사에서 〈만약 폴 오스터가 또 한 권의 실험적 창작 교재가 아닌 제대로 된 그냥 소설을 마음먹고 쓴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란 질문을 던졌다. 포스트모던적 글쓰기를 계속해 온 오스터에게 이제 독특한 구조, 애매한 현실과 허구의 경계 등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다. 더욱이 보이지 않는 은 최근 그가 보인 실험적 시도들에 비하면 자못 온건해 보인다. 즉, 이야기 속의 이야기의 형식을 띠고 있음에도, 이는 전통적 액자 구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정도라 할 수 있다. 독자는 40년 전의 과거를 회고하는 워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가 어떤 일들을 겪게 될지, 어떤 행동을 할지 다음의 진행을 궁금해한다. 젊은 날의 꿈과 욕망, 상처에 관한 워커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 이야기를 그려 나가는 문장은 담담하면서도 섬세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속으로부터 공감을 이끌어 낸다. 이야기 자체에 집중한 오스터는 그야말로 이야기꾼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인다. 기사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그래서, 이러한 형식의 소설에서 오스터는 얼마나 재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는가?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항상 말해 온 것만큼 해낸 것 같다. 섬세한 문체, 심리적 깊이, 작품성, 우화적 함의 등이 어우러진 이야기는 과연 거장답다.〉


언론평

이 소설은 최고 수준의 현대 미국 작품이다. 날카롭고 우아하며 활기차다. 이 작품은 오직 지독한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한, 힘들이지 않은 작품의 꿈을 실현하고 있다. 우리가 거장의 손아귀에 들어 있을 때 흔히 그러하듯, 우리는 한 문장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다음 문장을 읽고 있다. 소설을 읽어 나가는 것이 너무나도 즐겁기 때문에 이 소설은 쉽게 읽을 수 있다. _ 뉴욕 타임스

재미 면에서 봤을 때 보이지 않는 은 더없이 성공적인 소설이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 오스터의 아름다운 이야기의 막이 내리면, 우리는 지금까지 굉장히 멋진 막다른 계곡을 탐험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_ 텔레그래프

보이지 않는 은 매혹적이고도 매우 완성도 높은 소설이다._ 가디언

오스터는 정말로 마법사의 지팡이를 지니고 있다. _ 뉴욕 리뷰 오브 북스

오스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지적이며 품격 있는 작가이다 _ 워싱턴 포스트